오년만에 다시 찾은 태백산은
그동안의 게으름을 꾸짖기라도 하듯이
매섭게 반겨주었다.
겨울 태백산의 그 한기는 5년전의 느낌이 뼈속에 각인되어 있을 정도라서
이번 산행 때는 더욱 중무장을 했다.
상위 4겹(기능성 속옥, 짚업티, 구스다운 자켓, 고어텍스 외피)와 하의 세겹(30여년만에 처음으로 내복을 착용)을 입고,
기상청의 날씨도 미리 파악했다.
영하 14도 풍속 2m...
이정도의 온도는 이미 예상을 했지만 바람이 강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야간 열차를 타고 태백시에 도착해서 해장국을 한그릇하고
유일사입구에 있는 매표소에서 아이젠과 스펫츠를 착용하면서 기상청의 예보와 맞는다는 생각이었다.
새벽 4시 50분경부터 산행을 시작하면서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서 함께 한 일행들과
이런저런 농담도 하면서 경사가 심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맞았다.
그러나 앞에 보이는 산의 산등성이와 눈 높이가 맞아갈 무렵부터
머리위로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다.
저 정도의 바람이면 풍속 2m가 아니라 강풍에 해당된다.
고도가 높아질 수록 몸에 흐르는 땀이 식는 속도가 달라진다.
오늘 태백은 산행도 산행이지만 여명과 일출 사진이 주목적이기에 돌아갈 수는 없다.
장군봉 밑에 도착할 무렵에 서서히 여명이 오르기 시작한다.
발걸음이 급해진다. 달려야만 천제단에서 일출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걸음의 속도보다 해뜨는 속도가 더욱 빠르다.
할 수 없이 장군봉 바로 밑에서 주목을 전경으로 여명과 일출을 담기 시작했다.
그때는 바람을 잊었다. 사진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뿐...
카메라를 꺼내기 위해서 장갑을 벗고 카메라배낭을 열어서 카메라의 기본 세팅을 마치고,
장갑을 끼고 몇컷의 사진을 찍자 손에서 감각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들이치는 강풍. 몸이 휘청인다.
이런 날씨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몇컷을 찍고 손가락을 빼서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쥐었다 풀었다하면서 손을 녹인다.
너무 추우니 현기증도 느껴진다.
30-40컷을 찍으니 배터리 하나가 방전이 된다.
겨울 설악산과 태백산, 그리고 여러 산들의 겨울산행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 느끼는 체감적인 날씨는 상상을 불허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한 일행들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진을 포기한 표정이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란...
이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그 느낌을 모르리라...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들도 생전 처음으로 경험한 이런 강추위...
여기서 조금 더 머물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듯 하다.
결단을 내린다. 모두 장비 정리하고 하산하기로...
추위를 대비해서 준비한 소주, 보온병의 커피 그리고 간식거리도 소용없다.
쵸코파이가 열량이 없다는 것도 이날 처음으로 알았다.
무조건 하산이다. 내려가서 몸을 녹이고 생각해보자는 말 뿐이다.
만경사에서 컵라면도 귀찮단다.
이미 몸과 마음은 텅비어있는 일종의 공황상태이다.
거의 내려왔을 때 얼굴에서 표정이 되살아난다.
이번 태백산행은 나를 비롯한 함께한 일행들에게 아마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산행이자 출사였을 듯 하다.
올겨울에 덕유산에서 영하 15도와 강풍을 경험했지만, 태백산과 비교하면 봄날이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장비를 무력화시키는 자연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낀 산행이었다.
하지만 일년에 20여일정도에 불과한 장엄한 일출을 경험하고 사진으로 몇장 담은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겠지...